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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풍경

드라마틱! 2020. 10. 15. 21:53

급작스레 비가 왔다 양철 지붕 위에 찌그러져 얹혀있던 해는 어느새 뭉개지고 잠자리 몇몇이 비행 고도를 한번 높였다가 낮추고 다시 높였다가 낮추더니 훌쩍 담을 넘었다 여자 아이 하나는 급히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남자 아이 하나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골목 끝에서 울며 솟구친 매미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다시 솟구치고 나뭇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유지하려고 빗줄기에게 부딪쳐 갔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이다 비가 오자 지붕은 더 미끄럽고 담장은 보다 두터워졌다 어느새 남자 아이도 쪼그리고 앉아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가는 길과 한 나무에서 문이 닫혀 있는 집으로 가는 길과 닫혀 있는 집에서 다시 나무로 돌아오는 길과 그 길에서 새가 떠난 새집으로 가는 길에 떨어지고 있는 비를 함께 보고 있다

                                                                                                                          - "골목과 아이",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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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황순원 '소나기'의 詩편 같다. 여러 번 읽으며 그려지는 풍경엔 '소나기' 못지 않은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이제 막 펼쳐질 것만 같다. 하지만, 새가 떠난 새집으로 가는 길에 떨어지고 있는 비를 함께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가 이 詩를 읽을 적마다 아직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여, 시위는 매번 팽팽하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고 읽을수록 생생해지는 수채화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