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보기 좋으라구
내 방은 돼지우리다. 물론, 내가 그리 이름붙인 것은 아니다. 자동차 핸들커버와 각종 케이블과 컴퓨터 부품과 책과 옷가지와 고지서와 낚시도구 등의 잡동사니가 뒤엉켜 있다. 이런 분류되지 않고 뒤섞인 잡다한 것들은 베란다로 지나가기 위한 가운데 통로를 둔채 양쪽으로 이분되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방은 거의 이런 상태를 줄곧 유지한다. 특별한 일이란 집에 손님이 와서 머물렀다 갈 예정이거나, 스스로 짜증이 솟구쳐 대청소 겸 대정리에 돌입할 때 그러하다. 전자가 8할이요 후자는 1할이다. 나머지 1할은 이유없이 그냥 청소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한다. 지금도 난 그 한쪽에 위치한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는 중이고 그런 방에, 도시가스 검침원이 불시에 다녀갔다. 맞벌이 집이 많아선지 때때로 검침원들은 밤 늦게까지 가정방문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 같다.
"이상 없나요?" 가스렌지 콕크와 도시가스 보일러를 점검하는 여성 검침원에게 묻는다.
"네, 이상 없네요. 다음 점검은 8월쯤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검침원이 가고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방이 그런 꼴을 하고도 창피하지도 않아?"
"세상은 넓고 사람은 각양각색이야. 나 같은 이가 한 명뿐이겠어?" 하며, 나 역시 웃어넘긴다.
그게 오늘의 생각이었는지 좋은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지하철 역에 붙은 글귀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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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숙종이 지혜를 구하고자
당시 동굴 속에서 살고 큰 스승이었던 '라찬선사'를 방문했다.
라찬선사는 숙종이 왔는지 거들떠도 안보고 감자를 굽고 있었다.
선사는 감자가 다 익자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닦지 않고 혼자서 감자를 먹기만 하는 것이었다.
민망해진 황제는 한마디 던졌다.
"선사님, 우선 그 콧물이나 좀 닦으시지요?"
그러자 선사는......
"흥! 사람들 눈에 보기 좋으라고?"
한평생을 남 눈에 보기 좋으라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남들의 눈과 귀와 입 때문에
진짜가 아닌 가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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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침원이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자신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문제 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하거나 창피해야하는가? 필요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손님이 와서 머물렀다 가기로 예정되어있다면 집 청소와 정리정돈을 나는 즐겁게 한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평소 방이 더럽고 지저분할수록 청소의 결과는 눈부시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즐겁다. 목욕 후에는 옷을 털어 입게 되고 깨끗한 바지를 입은 사람은 그 바지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신경이 쓰이기 마련인데, 한 번 대청소와 정리정돈을 하면 필요 이상 철저하게 정리를 하면서도 웬일인지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대청소를 할 땐, 구겨진 메모지 하나도 다 펴서 내용확인 해서 필요한 것은 다른 곳에 옮겨적고, 못쓰게 된 부품은 나사 하나도 분해해서 모아놓고 서랍에 골판지 박스를 오려서 칸칸 칸막이를 만들어 정리한다. 구입한 모든 제품의 설명서를 따로 모으며 고지서도 종류별로 묶음으로 만들고 식빵 봉지를 묶는 선하나 그냥 버리지 않고 다음의 쓰임새를 생각하며 정리한다. 그런데 그런 깨끗하고 철저히 정리된 방의 상태는 한 달 이상을 가지 못하고 어느새 다시 돼지우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점차 그리 만들어놓고 느끼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 그 상태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보통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 상태가 오기 전에 다시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에 들어가겠지만, 내가 청소와 정리정돈에 느끼는 필요는 식욕보단 훨~씬 더 금욕적이다. 무언가에 집중해 있을 때의 배고픔은 정말 청소만큼이나 귀찮고 아까운 시간의 낭비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날마다 무슨 거창한 프로젝트 따위에 열중해 있느냐면 그건 아니다. 집에서 나는 남들이 보기에 시간 대부분을 빈둥거리며 보낼 뿐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제일 많은데 게임은 하지 않고 거의 웹서핑을 하거나 잡지나 책을 뒤적거리거나 영화를 보는 게 전부인데도, 나 딴엔 무지 열중이다. 내가 열중인 그것의 내용이 아무리 하찮아도 내가 그런 상태일 때 나는 그 이외의 모든것에서 완전한 분리와 독립을 원한다. 나는 그 시간을 위해, 청소와 정리정돈에 쏟는 시간을 미루는 것이다. 날마다 10분씩의 청소와 정리정돈보다는 한 달에 한 번 4시간을 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아침의 도토리 4개가 내겐 더 중요하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흔히 간교한 술책이나 어리석은 자를 이야기 할 때 등장하곤 하지만, 이것은 숫자의 논리다. 그것을 고사(故事) 그대로 음식으로 봤을 때도 아침에 주는 도토리가 3개냐 4개냐는, 합이 같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지금, 활동량에 따른 효율적인 에너지섭취와 식습관으로써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튼, 도무지 습관으로써의 '청소와 정리정돈' 이것을 내 행동양식에 포함 시키지는 못한다.
'소리를 닫고 형체를 지우면 어쩌면 나는 게으른 돼지 한 마리' 이런 제목을 붙인 적이 있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이지 않는 조용한 이 시간과 공간에, '나는 게으른가?'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가만히 내면을 응시한다.
나는 전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다만, 느린 사람이다. 또한, 느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빠른 일 처리 능력은 영영 없고 항상 마감에 쫓기는 사람이지만 내가 속한 집단에서 필요를 느끼는 어떤 일을 하는 이상, 나는 언제나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집중력 있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내 책상은 위에서부터 서랍 안까지 가지런하고 파티션에 정갈하게 붙여놓은 메모나 자료는 사장의 칭찬 대상이었다. 회사의 일이란 것이 대부분 주어진 시간안에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 다반사라, 안 그래도 굼뜬 일 처리 능력에 자료와 물건의 정리마저 안 돼 있으면 그야말로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 궁여지책인 면이 다분히 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와 같은 절박한 필요를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느린 사람이 좀 느리게 살고 싶은데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는 면이 다분히 있으므로 집에서는 더 느슨해지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해 노다메나 호타루 처럼 나는, 건어물男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사회적인 위치나 경제적인 능력을 또래 집단의 평균으로 바라보면, 느리고 게으르며 특별히 뛰어난 게 아무것도 없는 게 다르다면 다를까.
그러한 연유로 내가 이 사소한 것을 두고, 누구 좋아라고 며칠이 멀다고 부지런을 떨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오해(내 취향을 설명할 만큼 가깝지 않거나 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이들)는 마다하지 않겠지만, 가장 가까운 이를 위해서 때때로 내 행동양식을 굽힐 때도 있을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공간을 공유한 것이기 때문인데, 완전 분리 가능한 나만의 공간(자물쇠로 늘 문을 잠궈둘 수 있는 방)이 확보될 때까지는 적당히 버티고 있다. 이것은 지저분하고 게으른 습관 대한 변명이 아니고 단지 내 지론이 그러하다. 아내가 내 방을 '돼지우리'라 이름 짓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라찬선사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 그것은 복이 아닐 뿐 불행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의 충돌에 비한다면야.. 하하. 애교 수준의 충돌이니깐 말이다. 다만, 아직도 아내의 그 작은 바람을 좀 더 자주 들어주지 못함은 나로서도 참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아내가 있음으로 인해 다른 공간들은 잘 정돈되어 있거나 최소한 내 방처럼 내가 흐트러놓을 수 없는 그 제약에 또한 감사한다. 편히 휴식을 취할 공간은 나 역시 필요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