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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주고 싶은..

드라마틱! 2020. 10. 15. 21:46

 천득이 아저씨 왈, '인생은 마흔 살부터'라는 말 그 말인즉 인생은 마흔까지라는 말이다.'라고 한다.

 그럼 마흔 이후는 뭐냐고? '여생'이란다. 왜냐.. 자기가 '여태껏 봐온 소설의 주인공이 93% 마흔 살 이하였으므로.'

 이런 된장이 아닐 수 없다.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책을 샀어.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

발로 차 주고 싶은 게 정강이도 면상도 아니고, 다름 아닌 '등짝'이기 때문.

이것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 시점의 위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무언가를 '주고 싶은' 특별한 대상이 있는데,

정작 그 상대방은 자신을 제외한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

그 상태에 대한, 그 상태를 깨고 나란히 앉고 싶은 것이지.
서로 함께 바라보고 고민하고 대화하고픈 것에 대한 갈망.

그런 대상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의 집약이고 응축이기 때문이다.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이 제목에서 오는 울림은, 내게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울림이 큰 제목을 가진.. 얼핏 떠오르는 몇 개를 얘기해 볼까?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군자는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다' '치통을 참아낸 철학자는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

 '쓸쓸함은 울려 퍼진다.'..가 책의 첫 줄.

첫 문장을 종각에서 전철에 타면서 읽었는데, 그 이후 일곱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 난 첫 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너 줄 읽어 내려가다가도 다시 첫 문장을 읽으며 뚫어져라 쳐다봐 지곤 했어.
전철을 갈아타야 할 곳을 지나치면서까지.

던킨 도너츠 보다  배 부르고 달디단 그 제목과 첫 문장.

그것이 의미하고 암시하는 주인공간의 관계가 두 문장으로 벌써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 그러나 그뿐이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이후로 쭈~~욱 지루했다.

하여, 한 번에 다 읽기는커녕 며칠 만에 겨우 다 읽을 수 있었지.

제목이 주는 그 울림

첫 문장이 주는 오랜 여운

열일곱 살에 문예상을 타며 화려하게 등단하여

열아홉에 이 소설로 일본 권위 있는 문학상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된 여성작가.

열아홉 감수성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 들어버린 걸까?

150쪽에 달하는 분량의 특유의 문체가 오아시스처럼 가끔가다 목을 축여주는 부분이 있어서

그나마 책을 다 읽게끔 해준 동력이 됐을 뿐,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인물의 이야기에 길들여 있어서인지 여간 책읽기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은둔형 외톨이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소소한 사건으로 길게 풀어나가는 글이다 보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능숙하게 그려낸 신인'이라는 평에 공감은 하면서도

이것은 마치 분량으로 보면 10권짜리 한질 중의 그 1권의 이야기 같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 '전개'까지만 하고 끝내버린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


 열일곱 살 소녀와 일곱 날 밤을 내내 얘기한다고 해도

나는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언제든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되려, 어려운 것은 짧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이해의 정도는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만들어 내는 그 많은 신조어 알고리즘도 없이 압축된 황당한 줄임말과

TV라는 매체를 등한시하는 내게, 그들의 화법과 제스처에 관한 한 나는 늘 미숙아일 수밖에 없기 때문.

세대차이란 그 주제의 생소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재의 어휘 선택과 그 화법에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거기서 책을 탁 덮어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부분을 위해 거기까지 읽어내려 온 것이라고.

작가가 온 힘을 다해 말한 바는 바로 이것이다..라는 느낌이 딱 오는 것이다.

그런 책은 두어 번을 다시 읽어도 바보처럼 똑같이 그 부분 이상을 읽지 않았다.

거기에서 딱 멈춘 것이다. 뭐.. 그래도 좋았으니까.

제목인,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첫 문장인, 쓸쓸함은 울려 퍼진다

마지막 문장인, 숨결이 떨린다

이 책은 내게 웃기게도 딱 석 줄이면 족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날 회사 직원들을 사 들고 갔던 만 원어치의 던킨 도너츠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제목만으로 이처럼 큰 울림을 주는 책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작가가 열아홉이었다니까.


한 달여 만에 다시 읽고 위에서 말한 석줄 외에 밑줄 친 문장은 아래와 같다.

" 전율이 흘렀다. 포화 상태의 기분은 진정되기는커녕 만지는 것만으로도 터질 듯 아픈 여드름처럼

미열과 함께 점점 더 부풀어 오른다. 다시 올리짱의 세계로 돌아가버린 그 등짝을 위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있으니

숨결이 뜨거워진다.

  이, 어딘가 쓸쓸하게 움츠린, 무방비한 등을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다. 아파하는 니나가와를 보고 싶다.

갑자기 솟아오른,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이 거대한 욕망은 섬광과도 같아서 일순 눈앞이 아찔했다. "


 여주인공 '하츠'가 느낀 그 감정을 나도 이해한다.

그러나, 다시 그것들을 표출할 수 있을까, 하츠가 그 대상 니나가와를 발로 차 버린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연령에 따른 사회적인 요구가 그러하고 집단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열정도 이젠 쉬 피로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한 연유로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나이가 있음을 말한, 천득이 아저씨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나머지 7%가 있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마 그냥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이 책은 작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그날그날을 기록한 일기처럼 서술하고, 사건도 감정도 정말 자연스레 생겨나서 천천히 자란다.
 그것이 강점이요 어쩌면 한계다. 작가가 서른쯤 됐을 때 그려내는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