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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본

몇 달 전에 대하소설 토지 한 질을 사놓고 읽기 시작한 지는 이제 2주일. 여성 특유의 문체로 당시의 풍습과 생활상에 대한 묘사 등은 마치 사극을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나 TV사극으로써는 결코 세세하게 전할 수 없는, 독자로 하여금 낱말 하나하나를 짚어 읽어야 할 만큼 생경하면서도 그렇기에 더더욱 사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난 섬세한 필력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속도감있는 극 전개는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새로운 면면을 알게되어 기쁘다. 많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성격과 행동양식 하나까지 꿰뚫어 보는 안목이 탁월하여 그들이 책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당장 맞닥뜨린대도, 복색만 현대적으로 갖췄다면 전혀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참, 책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니다. 짬짬이지만 한참 재밌게 읽어내..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공원에서 잠깐

공원에서 잠깐 책을 읽고 있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매미가 운다. 올해 처음 듣는 소리라 책 읽기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어 매미가 있는 나무를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역시 녀석 혼자다. "너무 일찍 나왔구나." 보통 7년 정도, 인생의 99%를 땅속에서 지내다 짝짓기를 위해 지상에 나와 열흘에서 보름 남짓 살다 가는데, 그 외에 아무도 없다니 그 외로움이라니.. 녀석도 그걸 깨달았는지 울음소리는 얼마지 않아 그쳤다. 그리고 한참 지나도 다시 들리지 않았다. 땅바닥엔 곰개미 일개미들이 '그 사건'에는 아랑곳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행보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주 보고 울어도 끝내 전해지지 않는 마음도 있기 마련이고 비록 공허한 메아리처럼 허탈했겠으나 그 울음소리는 땅속에 잠들..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오래전에

두 개의 섬을 거느린 무의도는 영화 때문에 '실미도'가 더 유명해졌지만, 소무의도 그곳에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한다. 먼저 잠진도 선착장에서 승용차는 40대가량 사람은 300명가량을 한꺼번에 태우는 배로(주말이나 성수기엔 약간 더 큰 배도 다닌다) 무의도로 건너간다. 배는 보통 아침 7시가 첫 배로 30분 간격으로 운항하지만, 비수기엔 결항시간을 참고해야 한다. 계절에 따라 한낮엔 배가 없을 때도 있다는 말씀. ♣♧ 무의도 배편 시간 확인 차는 보통 승용차가 2만 원 정도(운전자 1인 포함). 외지방문객은 성인 1인 3,000원이다. 왕복요금으로 들어갈 때 표 끊어서 내고 나올 때는 그냥 나온다. 참고로 송아지 1,600원 돼지 1.300원 개 800원 자전거는 5,000원이다. ^^; ♠♤ 무의도 ..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칭찬

오랜만에 신나게 떠들었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으레 그렇듯 전후가 어렴풋하지만, 친구 얘기가 나오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10대는 멋모르고 20대는 서투르고 30대는 생각이 많아서 놓치는 그것에 대해.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멋모르고 서투르고 생각이 많아서 흘려버린 그 시간을 아우르는, 수면 깊은 곳에 가라앉힌 그것을 단번에 떠오르게 하는, 단 몇 줄의 대사와 그것이 생에 최고의 칭찬인 줄 알아보는 이의 행복한 표정이 주는 두 사람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사랑이 주는 의미에 대해 알아봐 주는 오직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만 기다리지 않고 마음을 전하는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영화는 지금껏 보아..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수채화 풍경

급작스레 비가 왔다 양철 지붕 위에 찌그러져 얹혀있던 해는 어느새 뭉개지고 잠자리 몇몇이 비행 고도를 한번 높였다가 낮추고 다시 높였다가 낮추더니 훌쩍 담을 넘었다 여자 아이 하나는 급히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남자 아이 하나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골목 끝에서 울며 솟구친 매미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다시 솟구치고 나뭇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유지하려고 빗줄기에게 부딪쳐 갔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이다 비가 오자 지붕은 더 미끄럽고 담장은 보다 두터워졌다 어느새 남자 아이도 쪼그리고 앉아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가는 길과 한 나무에서 문이 닫혀 있는 집으로 가는 길과 닫혀 있는 집에서 다시 나무로 돌아오는 길과 그 길에서 새가 떠난 새집으로 가는 길에 떨어지고 있는 비를 ..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인듀어런스

"거의 끝이 온 것 같군....... 배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거야. 선장,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아.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고, 단 며칠이 될 수도 있어......"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 이미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에 의해 북극점에 이어 남극점도 최초 정복이라는 타이틀과 그 영광스러운 명예가 넘어간 상태에서, 최초의 남극대륙 횡단을 목표로 했다가 결국 실패한 이 이야기가 아문센의 남북극 정복기보다도 더 회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오늘날까지 섀클턴이란 이름이 빛을 발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생.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사로 탐험대에 참여했던 헐리의 흑백사진과 살아남은 대원들의 탐험일지를 ..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이 결단을 두고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전태일의..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겨울밤의 미덕

긴긴 겨울밤이 주는 미덕 중의 하나는, 부엌 아궁이에서 타닥타닥하고 타들어가는 덜 마른 장작에서나는 소리와 잔 솔가지에서 송진이 녹아내리며 타는 냄새가 은근히 문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보는,책 읽는 즐거움. 아주 어렸을 적 외가에서만 가지고 있는 추억이다. 겨울밤 부뚜막 아궁이는 생각만해도 따뜻해져 온다. 온종일 찬바람 부는 들이나 갯가에서 연을 날리거나 망둥어나 게를 잡거나해서 놀다, 부르튼 손과 갈라진 입술 온통 흙투성이나 갯펄을 묻히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찾는 건 몸을 씻는 샘 옆이 아니라 당연히 따뜻한 아궁이 곁이였지. 봄 부터 가을까지라야 집안에서 논다면 그것은 물 펌프에 마중물을 한 바가지 퍼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며, 아이들 셋쯤 들어가 물장난을 할 수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눈이 내리네

여긴 지난밤에 첫눈이 내렸다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빗물에 차 바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는 비가 오나보다 했는데, 창 밖을 보니 웬걸 비가 아니라 눈이 내리고 있는거야. 싸래기 눈이 아니라 제법 목화 솜 같은 함박눈이 말이지. 밤은 깊어 인적이 뜸하여 첫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볼 만하였지만 자동차 지붕이나 건물 옥상엔 벌써 눈이 1cm 정도 쌓인 데 반해, 맨 땅엔 우리로서는 느끼지 못하는 온기가 남아있는 것인지 쌓이지는 않았더라네. 밤 눈이 내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 눈앞에서 내리는 눈은, 바람에 쓸리고 보이지 않는 땅의 힘에 이끌려 꽃잎 지듯이 내리는 눈인데 반해 가로등 밑으로 내리는 눈은, 꿈결같이 천천히 사뿐히 가만가만히 내리는 모양이 마치, 그 가로등 밑으로 흐르는 시간은 우리의 기준으로 흐..

카테고리 없음 2020.10.15

발로 차주고 싶은..

천득이 아저씨 왈, '인생은 마흔 살부터'라는 말 그 말인즉 인생은 마흔까지라는 말이다.'라고 한다. 그럼 마흔 이후는 뭐냐고? '여생'이란다. 왜냐.. 자기가 '여태껏 봐온 소설의 주인공이 93% 마흔 살 이하였으므로.' 이런 된장이 아닐 수 없다.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책을 샀어.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 발로 차 주고 싶은 게 정강이도 면상도 아니고, 다름 아닌 '등짝'이기 때문. 이것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 시점의 위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무언가를 '주고 싶은' 특별한 대상이 있는데, 정작 그 상대방은 자신을 제외한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 그 상태에 대한, 그 상태를 깨고 나란히 앉고 싶은 것이지. 서로 함께 ..

카테고리 없음 2020.10.15